채식주의자(한강)

Posted by 티쳐리
2017. 10. 20. 06:00 리뷰/책 리뷰

채식주의자(한강)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총 3개의 스토리를 한데 이어묶은 작품이다.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불꽃 순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시간순서대로 일어난 사건들이다. 다만 전개되는 과정에서 서술하는 인물의 관점이 바뀐다. 마치 이야기들이 서로 독립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하나로 묶일 수 있는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야릇한 성적욕망

<채식주의자>는 성적욕망의 분출과 발현을 야릇하게 그려낸다. 이런 성적욕망은 사건의 시발점과 절정의 순간 어김없이 찾아온다. 먼저 주인공 영혜의 남편의 시점으로 서술된 (채식주의자)에서 시작된다. 영혜 남편은 아내보다 수수하지만 눈이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영혜의 언니에게 관심을 갖는다. 음식 솜씨, 생계를 꾸려나가는 강인함, 많은 애교를 지닌 처형을 말이다. 그런 언니를 아내로 둔 동서를 부러워하며 속으로는 처형(영혜언니)을 갈망한다. 시선은 이제 처형의몸매로 들어서게 되고 그녀의 모든것에 더욱 끌리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것은 장기간의 금욕으로 인해 나타나는 일시적인 탐욕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일시적인 탐욕이 아닌 인간이라면 내재된 성적욕망의 분출을 보여주는것 같다. 아내 영혜와의 관계에서 느껴지지 않는 그 무엇, 생존과 생식욕구를 벗어나 만족감과 충만감을 느껴야 하는 그런 성적욕망을 소극적으로 표현한다.

영혜 남편이 소극적으로 내재된 성적욕망을 분출했다면 다음 장인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언니의 남편(그)의 시선으로 적극적으로 분출한다. 
어느날 그는 아들을 씻기다가 우연히 몽고반점에 대해 아내와 이야기한다. 아내의 동생(영혜)에게도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에 귀를 쫑긋세운다. 그 뒤로 몽고반점이 그려진 처제의 몸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상상은 점차 심해져 영혜와의 관계를 갈망한다. 그가 영혜를 우연히 만나고 온 날 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잠을 자는 아내를 덮친다. 그러나 자신이 느낀 욕망을 채우려하면 욕망의 만족은 눈앞에서 금방 사라져버린다. 그러던 어느날, 영혜의 집에 찾아간 그는 영혜의 나체를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그녀를 탐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고 작전을 펼친다. 자신의 미술적인 재능을 앞세워 영혜의 순수한 마음과 심리를 이용한다.  그는 그녀의 몸에 정성껏 바디페인팅을 하여 꽃으로 만든다. 그리고 자기 자신 역시 바디페인팅으로 치장한다. 서로의 몸이 엉켜들어가며 그는 욕망을 표출한다. 몽고반점을 핥으며 잠이든다. 
결국 그는 자신이 원하던 욕망을 달성한다. 그리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듯 자살마저 쉽게 할 수 있으리라 만족해한다. 겉으로는 예술활동이라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정작 자신의 성적패티쉬를 포장하여 해결하는 과감함이 두드러진다. 

서로 다른 두 남자의 시선에서 각각 영혜와 영혜언니를 탐욕하는 미러링, 쌍방구조가 인상깊다. 채워지지 않는 성욕이 우리 안에 내재되 있고 그것이 밖으로 분출되는 양상만 다를뿐 같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스스로 통제하고 사회적금기라는 사항으로 조절하고 있지만 언제든 터져나올 수 있는 그리고 부족함을 채워달라고 외치는 본성을 보여준다. 




온몸으로 받아 들이는 평화주의자 : 영혜

주인공 영혜는 어느날 육식에 대한 꿈을 꾸고나서부터 육식습관을 거부한다. 게다가 마치 자신은 원래 그랬다는 듯이 자신을 구속하고 묶어두는 것들을 거부한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집착한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상의를 벗고 집안에서 활보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언니의 집들이겸 친정식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사건은 터지고 만다. 영혜는 준비된 음식에 손조차 대지 않으며 육식거부를 계속한다. 그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못마땅해하던 아버지가 결국 화를 낸다. 억지로 그녀의 입을 벌려 힘으로 꾸역꾸역 고기를 집어 넣는다. 그러자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괴로움에 죽을 죄를 진거 마냥 소리치며 칼로 손목을 긋는다. 

영혜는 육식을 먹는 것을 동족살인 처럼 여기고 피했다. 그녀에게는 물과 햇빛이면 충분해 보였다.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한것은 왜그럴까? 그녀의 심리는 무엇일까? 그녀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나타난다. 
"내가 믿는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 세치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그녀는 자신이 하는 행동에 스스로 구속과 억압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쫒았다. 예전의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로 파괴되었던 것들을 돌려놔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든 사람처럼 말이다. 그녀가 폭력적이라 생각하는 행동들을 모두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언가를 다치게 할 수 있는 씹어먹는 행위, 크고잦은 몸짓들, 그리고 밖으로 뱉어냈던 수많은 말들을 삼켜버린다. 그녀가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을 구속하던 외부로부터 탈출하여 자신이 정한 구속과 억압에 맞춰가는 것이다. 몸을 죄어오던 옷을 벗고 온몽으로 바람과 햇살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사람을 벗어나 바디페인팅을 통해 완벽한 식물의 모습이 되었을 때 누구도 채워주지 못할 황홀감에 젖어들었다. 그녀는 식물이 되고자 했던것이다. 식물은 자기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어 낼 뿐, 동물처럼 무언가를 섭취하여 영양분을 얻지 않는다. 즉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피해를 입힐 염려가 없는것이 식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식물로서 새로운 삶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세상을 살아본적이 있는가?

남편과 동생의 불륜관계를 목격한 그녀는 이런 말을 던진다. 
"문득이 세상을 살아본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건 오래전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다." (나무불꽃,197p)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사는데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 왜 자신은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왜 내인생은 이럴까. 깊은 절망과 힘든 현실에 좌절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녀의 회환에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눈을 지긋이 감고 생각해봤다. 나는 삶을 살아온 것일까? 그냥 견뎌온 것일까? 이 삶이 내 삶일까? 다른 사람의 삶을 뒤쫒아 옆에 걸었던 것은 아닐까? 내것이 아니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견뎌내는건 아닐까? 살아왔다는 것과 견뎌왔다는 것에 대한 미묘한 차이를 짚어내는 날카로움에 경탄했다. 그녀의 날선 시선이 절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 날카로움에 찔리고 나서야 삶을 되돌아 보았다.

살다보면 내가 사는게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겼을 뿐이라는 느낌이 들때가 많다. 살아가는 것에는 진취적으로 자기가 앞으로 걸어나가지만, 흘러가는 것은 단지 흐름에 얹혀 이리저리 방황할 뿐이다. 눈을뜨고 내가 살아간 날 수를 세어보며 달력에서 숫자를 지워나간다. 많은 숫자가 아직도 남아있다.
눈을 감고 묵묵히 답한다. 오늘부터 내삶을 살아가리라. 삶은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이뤄내는 것이고 견뎌져야할 것이 아니라 살아가야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리라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