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헤세

Posted by 티쳐리
2017. 10. 23. 06:00 리뷰/책 리뷰

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헤세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나니 마음 한편이 답답했다. 마음 한켠에 들어 있던 작은 돌맹이가 점점 커져 돌덩어리가 된 듯이 무거워졌다. 떨쳐내려고 가슴을 부여잡으며 기침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책을 읽는 모든이들의 마음이 같은 거라 생각한다. 불편한 현실을 다시한번 직시하게 됐을 테니까 말이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말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너무나 섬뜩한 점라캉의 이 말이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수레바퀴 아래서>에서는 한스 기벤라트 소년을 중심으로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한스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부터 영민했던 그는 청소년기가 되면서 아버지와 마을주민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다. 마을자랑거리, 유명인사라는 호칭에 부흥하려고 하듯이 한스는 열심히 공부한다. 자신이 즐기던 낚시와 수영, 조립, 토끼 기르기 등을 하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라틴어, 대수학, 그리스어 등으로 채워진다. 늘어가는 과목과 시간이 많아질 수록 그의 두통을 점점 심해진다. 한편으로는 동네 친구들을 자신이 내려다 보게 될 거라는 상상으로 작은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노력한 결과 한스는 주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해서 신학교에 들어갔다. 1등을 하지 못한 한스를 두고 아버지는 못내 아쉬움이 남아있는듯 했다. 아버지는 한스에게 "우리집안의 명예를 높여다오"라고 하며 부담감을 심는다.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그의 두통은 점점 심해진다.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며 자신을 괴롭힌다. 

한스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게는 자신이 좋아하던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한스는 공부를 선택했다. 나중에 동네친구들을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 였을까? 신학교를 준비면서 그리고 입학한 이래로 나타나는 두통의 증상을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없을것이다.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있을것이다. 한스는 스스로 자신을 옥죄이며 공부를 했다기 보다는 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해 만들어진 공부기계였다. 한스를 압박하고 통제한것은 다름아닌 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여느 다른 부모들처럼 자식이 가능한 대학을 마친뒤 관료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에 한스에게 지속적인 학업의 부담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교장선생님, 주목사 등 마을사람들 역시 자기 마을의 자랑거리가 탄생하도록 격려와 가르침으로 포장된 충고와 압박을 주었다.
한스는 이런 통제된 환경과 분위기에 스스로를 맞춰나가며 목적지 없이 열심히 노를 젓는 배에 불과했던 것이다. 주변에서 바라는 길로 나아가기를 자기도 원래 생각하고 원했다는것 처럼 마치 자신이 자기배의 선장이라는 착각을하며 말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욕망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두통이라는 고통아래 회의감과 괴리감으로 평생을 지내야 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너무나 불행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정작원하던 것은 따로 있었지만 그것에 다가가는 순간 옆에서 누군가 자신을 끌어당겨 다른곳으로 데려가기를 반복하기만 해야했다. 설령 시간이 남아 예전의 즐거움을 찾아 다닌다 한들 두통의 고통을 줄어들지 않고 늘어만 갔다. 한스는 이렇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착각에 빠진 기계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나이를 불문하고 지금 자신이 서있는 위치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이 자기가 원해서 얻은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내가 바로 한스가 아닐까?



날카로운 비판

교장이 한스에게 말했다. "여기서 지처 쓰러지면 인생의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아." 너무나 섬뜩한 말이다. 인생의 수레바퀴를 끄는 누군가 따로 있고 자신은 그아래에 놓여있는 상황이라는 것은 끔찍할정도로 무섭게 만든다. 과연 누가 자기 인생의 수레바퀴를 끌고 있으며 왜 나는 그 아래에 놓여질 수 밖에 없을까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낀다.

'교사의 의무와 국가가 교사에게 맡긴 사명은 어린 소년들 속에 있는 자연의 거친 힘과 욕망을 제거하거나 뿌리뽑고, 대신 그 자리에 국가에서 공인한 온건한 평온한 이상을 심어주는데 있다. 이런틀을 벗어나는 사람은 천방지축 날뛰는 개혁가, 쓸데없는 생각에만 집착하는 몽상가로 치부해버렸다.'   
소설속에서 헤르만헤세는 단호하고 날카로운 말투로 학교, 교육 상황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날카롭고도 쓰라린 말들을 읽으면 읽을 수록 공감할 수 박에 없다. 소설속 배경은 독일의 19세기 교육현장이고, 지금은 21세기 대한민국 교육현장인데도 격렬하게 그의 말에 동감하게 된다. 100년이 넘는 시간, 두 세기가 바뀌는 시간차이를 극복하고도 교육에서 부당한 모습들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고 그게 우리 나라 교육이라는 것에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할 수 밖에 없는 한스 기벤라트. 길을 걷다가도 주위를 둘러보면 멀지 않은 곳에 한스들이 보인다. TV와 인터넷으로 뉴스를 통해서만도 우리사회 한스는 자주 보인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주는 것이 교육이여야 할텐데 이미 옳다고 정해진 길로 이끄는 것이 교육이라불리는 것이 한스의 시대때도 우리의 시대때도 변하지 않았다. 

합당한 목적, 이유도 없이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우리는 그저 현재의 욕망을 미래로 유보시키기만을 강요하고 있다.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것이 있다.
필자는 마시멜로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공감하지 않는다. 마시멜로는 현재의 쾌락을 참으며 견뎌내면 미래에는 두배의 보상이 혹은 그보다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에 다가가는 방법으로 유보라는 것을 정당화 시킨다. 오늘의 행복보단 내일의 행복이 더 큰 가치이며 지향점이라고 전제를 하고 출발하는 것이다. 

물론 틀린말은 아니다. 하지만 합당한 절차를 통해 학생들이 이해를 하고 욕망을 유보하거나 즐기거나 선택할 기회를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교육과 <수레바퀴아래서>의 교육은 그저 강요,통제에 의한 그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미래를 생각할 필요없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적당히 미래를 걱정해야지 지나친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현재 욕망이란것은 남들에게 피해가 안가는 선에서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욕망의 유보아래 미래를 위한 통제된 절차를 밟아나간 한스기벤라트는 결국 죽은채 강물에서 발견된다. 이쯤되면 그의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인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는 이미 자살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궁지까지 몰아간 것은 그의 곁에 있던 수많은 어른들과 학교, 사회와 제도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학생들이 한스로 만들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요즘들어 그런 문제의 심각성들을 고찰해보고 여러 노력의 과정들이 시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한스는 우리주변에 널려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에는 한스 기벤라트 이외에 저자와 비슷한 이름의 헤르만 하일너가 나온다. 헤르만 하일너는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자유롭고 활기찬 영혼이었다. 어른들은 그를 그저 몽상가, 사고뭉치, 문제아로 낙인찍어 버렸다. 이런 하일너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대변해주는 인물로 느껴졌다. 
그러한 와중 찾아보니 헤르만 헤세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이 쓰여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헤르만 헤세는 어릴적 신학교로 들어가 공부를 했다. 하지만 그는 답답한 현실속 자신과 시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의 괴리감에 못이겨 자살을 시도했다. 이와 더불어 정신병증세가 생겨나며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마치 소설속 하일너와 한스는 헤르만의 두 대조적이고 괴리적인 자아를 직접 표현해낸것 같다. 자신의 뜻과는 맞지 않아 답답한 현실에서 고통받는 자기를 한스로 표현하고, 시인이 되고자 했던 욕구와 꿈을 쫒는 아이였던 자신을 하일너를 통해서 그려냈다. 그리고 두 아이는 서로 다른 모습에 알 수 없는 위로의 감정들을 느끼며 친해진다. 어느정도 가까워 지는 순간 그 둘은 서로 처음보다 더 멀리 떨어져야했다. 마치 헤르만헤서 자신이 갈등으로 고통받는 모습처럼 말이다.

헤르만헤세의 문학적인 표현들과 비판적인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그의 모습이 소설속에서 적나라하게 반영됐다는 점이 이소설의 가치를 더 올려주는 거 같다
결국 하일너와 한스가 화해를 하듯 우리들의 한스도 하일너를 찾아 괴리감에서 벗어난 인생을 이책을 통해 시작했으면 한다.